NetZ 이야기

NetZ 이야기 – 5. 퇴사하기

글쓰는 프로그래머 2010. 11. 7. 01:00

퇴사하기

10월말에 사장님 보고를 하고 11월이 되었다. 지긋지긋 했던 프로젝트도 완료가 되어 사용자 교육을 하였다. 영업사원 100여 명을 모아놓고 교육을 하노라니 감회가 새로 왔다. 고객사의 사장님도 참석을 하셨는 데 교육이 끝난 후 강평말씀 중에

"프로젝트에 수고가 많았다. 교육 중에 개인별 매출액 등을 확인 할 수 있는 화면이 보이던데 이러한 기능이 영업사원 개개인을 평가하는 자료로 쓰여선 안되겠다"

란 말씀을 하셨다. 그 때 그 말씀이 무척이나 기억에 남는 데, 그 순간, '내가 개발한 프로그램이 누군가를 쪼이는 수단으로 쓰일 수도 있구나'란 생각을 했다.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진 못할 망정 쯔쯔. ㅎㅎ

며칠이 흘렀다. 서울에 기획팀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사내 벤처팀에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리고 또 며칠이 흘렀다.

하루는 팀장님이 나를 부르시더니

"서울에서 연락이 왔는 데, 이채성씨가 왜 빨리 서울로 오지 않느냐고 사장님이 뭐라 하셨다고 하네요. 그리고 돈 문제 말인데 기획팀에서는 한번도 임직원이 개발한 프로그램에 대해서 대가를 준 적 사례가 없어서 돈을 주기는 어렵다네요"

결국 예상했던 답변을 들었던 거 같다. 사장님 보고 후에 일말의 희망을 가졌던 내가 바보였던거 같았다. 이럴 거 였으면 그 바쁜 와중에 왠 사업계획서는 그렇게 많이 쓰라고 했는지. 그 장단에 춤추며 열심히 문서 만들고 했던 내가 바보같았다.

이제 양단간에 선택을 해야 했다. 아무 소리 않고 서울로 올라가 내가 개발한 프로그램 소스 회사에 고스란히 내놓고 열심히 업그레이드 하는 거랑, 회사를 그만 두는 거. 둘 중에 하나는 선택해야 하는 거 같았다.

기획팀에서 사장님한테 얘기는 한번 꺼내봤었는지 궁금했다. 아마 얘기도 못 꺼내봤을 거 같았다.

신뢰.

만약 기획팀에서 내게 프로그램을 내놓으라고 얘기하지 않았다면, 법무팀에 내 프로그램의 저작권에 대해서 나 몰래 알아보지 않았었다면, 혹은 그 결과를 내게 알려줬었다면, 정보화 촉진 기금 건에 대해서도 보다 투명하게 처리하였다면, 무언가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까지 나를 몰고 가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그냥 회사에 남아서 A정보시스템 최연소 팀장이 되는 길을 택했을 지 모른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 않아? 대리나 과장도 아니고 사원이면서 팀장 노릇 하는 거. 그것도 나이 스물 아홉에 ㅋㅋ. ? 요즘 벤처회사엔 20대 이사들도 많지만 A정보시스템은 그런 벤처가 아니었다. 직원 수 1,700명에, 팀장들은 보통 40대 이상이었다. - 하지만 그러기에는 내가 회사에 갖었던 신뢰는 이미 너무도 퇴색되어 버린 후였다. 프로그램이 사업화에 성공하면 성공의 과실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가져갈 것 같았다. 그리고 프로그램이 사업화에 실패한다면 나는 아예 매장이 될 거 같았다.

1주일이 지났다. 프로젝트 오픈 후에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프로그램 설치해 주고 설명해 주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냥 아무일 없다는 듯이 이렇게 회사 다녔으면 했다.

서울에서 IT회사에 다니던 고등학교 친구와 메신저를 할 기회가 있었는 데,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거기 자리 있냐? 나 가도 되냐?"

"그럼. 이력서 보내봐, 팀장한테 주면 그냥 오라고 할 꺼야. 서울에 와서 알아보면 네 프로그램에 대한 기회도 훨씬 많을 꺼야"

이력서를 써서 저녁 나절에 메일로 보내니 다음 날에 친구한테서 연락이 왔다.

"서울로 바로 오래"

"어 그래? 고맙다"

형식상 얼굴은 한번 봐야 되지 않겠냐고 해서 서울에 올라가서 팀장을 만나 봤다.

근무조건도, 연봉도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채, 내려왔지만 서울에 갔다 내려온 후에 퇴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새 신을 사기 전에 헌 신을 버려선 안 돼요. 헌 신을 먼저 버리면 새 신을 사기전까지 맨발로 다녀야 하거든요"

프로젝트를 같이 했던 황대리님이 일러준 얘기대로, 새 신을 구했으니, 이제 헌 신을 버리면 되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마음이 착잡했다.

며칠 있다가 임원면접도 봤다. 마침 그쪽도 공채를 진행하고 있었다. 12월 초에 입사하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다.

PC 유지보수를 하던 주과장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퇴사하는 방법에 대한 얘기가 나와 주과장이 사직서 쓰는 방법에 대해서 설명해 줬다.

다이어리 맨 뒷장에 나오는 - 요즘 다이어리에는 사직서 쓰는 양식 같은 거 안 나오더군. 왠만하면 사직서 쓰지 말란 얘기겠지? ㅋㅋ - 사직서 쓰는 법을 일러줬다.


워드로 쳐서 내는 것 보단 손으로 써서 내는 게 나을 거 같았다. 그게 예의인 것도 같았다. 다이어리의 사직서 양식에 한문으로 쓰여 있던 탓에, 잘 쓰지도 못하는 한문으로 여러 번 다시 쓴 다음에 정말 정성들여 사직서를 썼다. 사직서를 쓴 날에는 사직서 종이를 만지작만지작 거리다가 팀장님께 못 드리고 그 다음 날 점심나절에서야 결재판에 넣어서 팀장님께 내밀었다.

책상에 앉아서 한참을 보시던 팀장님이 말씀했다.

"이채성씨, 양식이 이게 아니요~"

그 한마디 말씀에 쓰러지는 줄 알았다. ㅋㅋ.

사직서 양식.
그건 5년여 동안 우리팀에서 한번도 쓰인 적이 없다 했다. 그러니 내가 봤을 리가 있나? 본사 인사팀에 연락을 했더니 사직서 양식은 메일로는 보내 줄 수 없고 파우치로만 보낼 수 있다고 했다.
다음 파우치가 도착하려면 1주일. 사직서 아닌 사직서를 내밀고 사직서 양식이 도착을 기다리며 업무 인수인계를 시작했다. ㅋㅋ.

1주일 후에 사직서 양식이 도착했고 사직서를 썼다. 사직을 하는 데도 절차가 복잡했다. 여기저기 서명을 받아야 하고 이것저것 반납도 해야 했다.

여기저기 인사도 다녔다.
내가 유지보수 했던 수출관리시스템이랑 OASIS랑 또 SIMAX시스템의 현업 사용자분들에게 가서 인사를 했다. 잘 써 줘서 고맙다고 말씀 드렸다. 정말 고맙다고 생각되었다.

사직서를 쓴 후 얼마 되지 않아 퇴사를 했다.  
그게 11월 말.
아주, 아주 맑은 날이었다.

 

이전이야기 - 사장님 보고
다음이야기 - 파란만장했던 포탈 프로젝트